로사숙제 - 조하윤

909 2021.10.20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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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상


계유정난
1453년 단종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
세종(世宗)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文宗)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 남지가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한 이후 좌의정은 김종서, 우의정은 정분(鄭笨)이 맡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두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에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주륙(誅戮)하였는데,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상계(上啓)할 틈이 없었다’고 사후에 상주(上奏)하였으며, 곧 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生殺)계획에 따라 황보 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찬성 이양(李穰) 등을 궐문(闕門)에서 죽였으며,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趙遂良) 등을 귀양보냈다가 죽였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 인 ·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賜死)하였다.
수양대군은 10월 10일의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의정부영사와 이조 ·병조 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그의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계유정난이라 하는데, 이 사건에 공이 있다 하여 수양대군 ·정인지 ·한확 ·이사철(李思哲) ·박종우(朴從愚) ·이계전(李季甸) ·박중손(朴仲孫) ·김효성(金孝誠) ·권람(權擥) ·홍달손(洪達孫) ·최항(崔恒) ·한명회(韓明澮) 등 37명은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다.

 

 

5.16 군사정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이 제2공화국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
5·16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군(軍)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 ·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6 ·25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던 군부 내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사건(下剋上事件)’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1960년 9월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그 6개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張勉)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하여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하였다.
군정기간 중 군사혁명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시행하였다. 1963년 말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제3공화국은 정식 출범하였다.
반공분단국가의 위기상황에서 권력을 지향한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문화의 사회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연, 산업화의 지역 ·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12.12 군사정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10·26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쿠데타와 혁명의 차이
쿠데타란 “국가에 대하여 일격을 가한다”는 라는 뜻으로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영어 ‘stroke of state’가 의미하는 것처럼 개인이나 집단이 폭력을 행사하여 정부 당국의 지위를 비밀리에 기습적으로 탈취하는 행동을 말한다.
혁명이란 피지배계급이 기존체제를 변혁시키기 위해 비합법적인 방법으로써, 정치권력을 지배계급으로부터 획득하려는 권력교체 방식이다.
내 생각은 집단적으로 물리적인 폭력을 썼는지 안썼는지가 차이점인 것 같다

 

 

관상이라는 영화는 초반에는 유머러스하게 재밌게 표현해서 역사영화를 코미디 영화로 만든 줄 알았는데 뒤로 갈 수록 관상을 무섭게 써먹어서 영화가 무서웠다

 

2. 명량


1.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전세를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해류를 잘 이용해서 상대편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잘 간파해낸 것 같다.


2.임진왜란이 조선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조선이 쇠락한 이유는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3궁이 방화로 없어졌고, 종묘와 보신각, 사대문을 제외하고는 궁성과 육조가 다 타버렸다. 그리고 일부 사찰들도 일본군의 약탈당하거나 불에 타버렸다. 약탈된 문화재들은 일본 열도로 반출되어 일부는 파손되었거나 혹은 완전히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됐다.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조차 전주 사고의 판본 1질만 남기고 다 소실됐다. 그 외의 관련 사료들이 대거 소실되면서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이전 기록이 매우 소략하게 되었으며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만 남아서 조선이 많은 손실을 하게 되어서이다.

 

명량영화는 이순신 장군을 연기하신 최민식 배우분이 정말 연기를 잘 하신 것 같다
그리고 다른 배우분들의 연기력 또한 아주 대단했던 영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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