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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투고글입니다: 우리 교육을 위한 변명

795 2016.04.1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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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우리 공교육을 위한 전직 교사의 변명 / 정은주

나는 전직 교사이고 아이를 초등 대안학교에 보내고 있는 늦깎이 부모다.
 
20년 전 내가 담임했던 졸업생들을 만나는 자리가 최근에 있었다. 풋풋했던 소년들은 30대 중반의 건실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지난 추억의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한 가지 일화가 화제가 됐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 12개 학급 중 내가 담임한 반이 모의고사만 보면 도맡아 12등을 했는데, 급기야 수업 들어오는 교사들마다 걱정을 할 정도로 만년 꼴찌 자리가 굳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담임인 내가 아이들에게 농담 섞인 제안을 했다. “그렇게 일관되게 꼴찌 하기도 얼마나 힘든 일이니? 이번엔 12등 대신 11등을 한번 해봐라. 소원 다 들어주마.” 그러자 아이들은 환호했다. “아무 소원이나 돼요? 그럼 담임 바꿔주세요!” 내가 대답했다. “11등만 해보렴. 그 정도 소원을 못 들어주겠니?” 다음 모의고사 결과가 나왔다. 10등이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얼마나 통쾌해하는지 웃음꽃이 피다 못해 광기(?)마저 흘렀다. 한 아이가 춤을 추며 말했다. “선생님! 우리가 해냈어요. 담임 언제 바꿔주실 거예요?” 그러나 아이들 얼굴에 가득했던 웃음은 내 대답으로 일순간 사라졌다. “내가 언제 10등 하라고 했니? 약속 조건을 잘 생각해봐. 11등도 못한 주제에!”
 
그 후 아이들이 만년 꼴찌를 이어갔는지 어쨌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나 자신은 공교육 교사로서 나름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아이들을 공정하게 대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졸업생의 다음과 같은 얘기는 내가 완전히 잊고 있었던 반전의 과거를 말해주었다. “선생님이 나중에 저희들 자리 배치를 성적순으로 하셨어요. 1등과 꼴찌를 짝으로 해서 순서대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성적순으로 학생들의 자리를 배치하던 다른 교사들을 비난하곤 했는데, 나도 똑같은 일을 한 것이다. 욕하면서 따라간 꼴이었다.
 
그날 만난 제자들은 어린 자녀들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한국 교육을 걱정하고 있었다. 저녁이 있는 느린 삶을 원하고, 자녀들에게 경쟁교육이 아닌 사람다운 가르침을 주고자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에 뭉클했다. 내 아이가 다니는 대안학교 이야기도 함께 나누면서 다시금 우리의 교육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공교육 교사들이 진정한 교육을 고민하는 한 그들은 마치 고립된 섬처럼 존재한다. 여러 모임과 단체들이 있지만 한국의 교육체제는 교사들의 자발적 연대를 계속해서 방해한다. 우리 사회의 깊이 내면화한 가치들을 샅샅이 들춰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자꾸 겉핥기 식의 제도 변화만 꾀하다 보니 학교는 그야말로 경쟁의 늪에 깊이 가라앉아 있다.
 
요즘은 전직 교사가 쓴 책 <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를 읽으며, 의식의 혁명은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됨을 느낀다. 성적에 얽매이지 않는 교사가 되고자 했던 나 자신이 아이들의 자리를 성적순으로 배치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은, 일상 속 성찰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반면 ‘작은 학교’를 지향하는 대안학교 교사들은 학교 안팎으로 끊임없이 연대하며 하루하루의 실천을 점검하고 자신을 돌아본다. 대안학교가 유토피아도 아니고 시행착오도 있지만, 연대의 힘은 막강하고 그 안에서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란다.
 
공교육에도 이런 되먹임(피드백) 체제가 하루빨리 자리잡기 바란다. 이는 어느 한 사람의 깨달음이나 표면적 제도 변화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교사들의 자발성과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회 전체의 합의가 절실히 필요하다.
 
정은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댓글목록

민우아빠님의 댓글

엄지척

밥풀님의 댓글

불이졸업생들은 나중에 샘들 만나 무슨 얘기할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ㅋ
디토샘, 제자들 피해다니지 않고 마주하는 것만으로 성공하신 거 같습니다.^^

7기양가은모노래님의 댓글

글로 생각을 함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안학교 선생님들을 존경하고 깊이 신뢰한답니다.^^

은수민맘님의 댓글

신문에서 잘 봤습니다!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하니☆님의 댓글

디토샘~~ 글 감사합니다~^^

메아리님의 댓글

가슴이 뭉클~
함께할 수 있어서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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